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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와 게임의 유령론 | 학교에서 있었던 무서운 이야기 (SFC, 1995)

학교를 벗어나고 싶었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방과 후에는 야자실에 갇혀 있다가 밤 늦은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간다. 그것의 반복. 다른 학생들이 어떻게 멀쩡히 지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밤이 되면 야자를 피해 학교 복도 뒤에 마련된 탈의실 공간에서 잠을 자거나 학교 주변을 맴돌면서 시간을 보냈다. 더러운 매트에 누워 스마트폰을 하다가 학교 경비가 순찰을 돌 때마다 기둥 뒤에서 숨을 죽였던 기억이 난다.

밤의 학교는 어둡다. 추위와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배터리를 아껴서 스마트폰 에뮬레이터로 게임을 했다. 학교 건물은 와이파이가 잡히지 않아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고, 나는 작은 용량으로도 오래 플레이 할 수 있는 고전 텍스트 기반 게임을 선호했다. 낮 수업 시간 동안에는 주로 일본어 공부를 했고, 밤 중에는 『역전재판』 시리즈, 『카마이타치의 밤』 등의 텍스트 어드벤처, 사운드 노벨 장르의 게임을 플레이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몰두한 게임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이었다. 조악한 실사 그래픽과 불안한 사운드, 과격한 이야기들로 가득한 이 게임에는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생동감이 있었다. 학교 공간은 유령에 씌여 있었다. 그 유령은 학교의 권위와 규율로부터 온다.




학교라는 저주

1995년 슈퍼 패미컴으로 발매된 『학교에서 있었던 무서운 이야기』(이하 『학무』)는 학교 신문부에 소속된 주인공이 학생들이 들려주는 무서운 이야기를 취재하는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괴담회에 모인 학생들을 지목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데, 게임 내에서 어떤 학생을 몇 번째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종류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신도 마코토를 첫 번째 이야기꾼으로 지목하면 복도에 걸린 거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네 번째로 지목하면 복싱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이다. 이렇게 같은 학생이라도 지목하는 순서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볼 수 있다.

『학교에서 있었던 무서운 이야기』의 이야기꾼(語り手) 선택 화면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는 기본 시나리오는 36개다. 여기에 마지막 이야기꾼에 의해 결정되는 7번째 이야기,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만 열리는 숨겨진 이야기까지 합치면 총 50개의 시나리오가 존재한다. 시나리오 내에서도 선택지에 따라 다른 전개가 펼쳐지거나 전혀 별개의 이야기로 분기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게임 내에 등장하는 모든 이야기를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게임과 함께 발매된 공략집에도 누락된 이야기가 있을 정도라고 한다.)

리플레이, 리플레이, 리플레이... ​

방대한 시나리오와 미로같이 꼬여 있는 선택지, 어디서 트리거될지 모르는 숨겨진 지문들이 게임의 끝을 가늠할 수 없게 한다. 같은 학교, 같은 학생, 같은 CG, 같은 BGM, 매번 다른 시나리오. 반복적인 게임 플레이가 귀신에 씌인 듯한 노이로제와 정신착란을 유발한다. 플레이어의 동기는 이야기를 읽는 것에서 시스템 자체를 즐기는 차원으로 조금씩 옮겨간다. 

영원히 반복되는, 끝나지 않는 괴담회. 주인공과 6명의 이야기꾼들은 신문부 부실에 갇혀 무서운 이야기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저주에 묶여 있다. 일각에서 귀신들린 게임으로 유명한 이 게임은 플레이어의 손에 의해, 반복적인 플레이 경험을 통해 비로소 귀신들린 게임이 된다.




학교 공간의 유령들

게임은 항상 시간보다는 공간에 대한 매체였다.¹ 『학무』에서 ‘1990년대’라는 시대적 맥락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 반면 ‘고등학교’라는 공간적 요소가 뚜렷하게 부각되는 것은, 학교가 수십 년 동안 변하지 않은 정체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학교의 괴담은 그것의 공간적, 제도적 특성으로부터 기인한다. 게임 내에서 학생들이 지켜야 할 금기는 언제나 학교의 특정 장소와 관련된다. 3층 여자 화장실의 두 번째 칸에는 지박령이 나온다. 구교사 뒷마당에는 악령이 씌인 벚꽃나무가 있다. 수영부 부실의 잠긴 로커에는 죽은 선배의 귀신이 씌여 있다. 학교 도서실에 기증된 책들 중에는 저주받은 책이 있다. 학교의 유령들에게는 분명한 규칙이 존재하고, 이에 순응하지 않는 학생들은 예외 없이 불운한 사건에 휘말린다. 학교 공간에 서린 ‘유서깊은’ 권위는 유령으로 치환된다. 학교의 주인은 결코 학생이 아니다.

방과후 괴담회에 모인 학생들은 학교에 깃든 유령들의 일화를 플레이어에게 전승한다. 그들은 직접 이야기의 피해자가 되거나 규범을 어긴 주인공을 응징하기도 하면서 유령적 권위의 산증인이 된다. 이야기를 마친 사람이 차례로 사라져가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유령에 홀린 듯 이야기를 멈추지 못한다. 그들의 역할은 학교의 유령들을 대변하는 것이고, 이는 학교의 권위를 대변하는 일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괴담회를 통해 그들은 학교의 권위에 종속된 지박령이 된다. 거대하고 위압적인 학교 앞에서 학생들은 학교와 자신을 구분하지 못한다.² ³


***


『학무』의 오래된 팬사이트에서 이 게임의 플레이 경험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그 경험들에 집착했다. 한밤 중에 브라운관 TV로 『학무』를 플레이하는 감각이 어떤 것일지를 상상했고, 오직 그 경험을 재현하려고 패미컴과 소형 TV를 구매하기도 했다. 이제 나는 공동의 플레이 경험이라는게 가능한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90년대 일본의 낡은 다다미방에서 슈퍼 패미컴으로 『학무』를 플레이 하는 것과, 학교 복도 뒤편의 매트에 누워 에뮬레이터로 『학무』를 플레이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다. 같은 학교 안에서도 나와 다른 학생들은 서로 다른 경험을 했겠지만, 과도한 경쟁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학교의 교육 체계가 우리가 가진 공동의 문제를 흐릿하게 만들었다고 믿고 싶다.

나는 여전히 학교를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매년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고등학교 시절의 감각을 상기하는 것처럼, 게이밍 경험에는 퇴행적 감각이 어느 정도 혼재되어 있다. 플레이어만을 위한, 플레이어를 향해 수렴되는 세계. 현실의 구조적, 공간적 요소들을 대변하는 게임 내 세계는 자연스레 현실의 대안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한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행위가 현실로부터 도피한다는 함의를 받는 것은 어느정도 타당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게임은 현실 이상이다. 나는 때때로 이 게임이 플레이어를 적대시한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학무』에는 학교의 모두가 유령에 씌여 있다고 생각했던 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은 내게 주인공의 학급에서 벌어진 이지메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이야기하는 도중 그녀는 내게 이지메를 방관한 책임을 물었다.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부조리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녀에게는 규율에 순응하는것 자체가 “모두 유령에 씌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부조리한 일이었던 것이다.




살인 클럽

『학무』의 주인공은 온갖 이유로 저주에 씌인다. 영의 기분을 해치거나, 놓인 음료를 무심코 마셨다가 인간이 아니게 되거나, 학생들이 직접 자신에게 씌인 저주를 전가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 밖에도 학생들 자신이 괴담의 대변자이기에, 그들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상하게 하면 얄짤없이 저주에 씌이게 된다. 그런 학교의 위계 질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가 바로 “살인 클럽”이다. 

살인 클럽은 『학무』를 대표하는 시나리오 중 하나로, 그동안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학생들이 갑자기 돌변해 주인공을 죽이려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게임의 장르는 학교 공간 전체를 탐험하는 어드벤처 게임으로 변모하고, 플레이어는 제한 시간 안에 학생들의 습격을 피해 학교를 탈출해야 한다. 살인 클럽은 수백 개에 달하는 선택지와 예측 불가능한 배드 엔딩, 반복 플레이를 강요하는 극악한 난이도로 악명높다.

살인 클럽의 이야기꾼들은 ‘지금까지 들려준 괴담들은 모두 꾸며낸 것’이라며 플레이어를 조롱하는데, 마치 학교의 유령들을 대변해 온 학생들이 스스로 게임의 전제를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거리낌없이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여전히 학교 규범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살인 클럽은 사회의 높은 지위에 있게 될 학생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사회 전체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집단이라고 묘사된다. 더 이상 유령 뒤에 숨을 필요가 없어진 학생들은 학교 공간과 동화되어 노골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결국 이들의 과격한 행보는 유령 씌인 학교로부터 초자연적인 요소를 벗겨냄으로써 학교 권력의 부조리함을 드러낸 것에 다름 아니다.⁴ 

악의적인 게임 디자인을 파훼하고 해독제를 찾아내는데 성공한 주인공은 교문 앞에서 살인 클럽의 리더와 결전을 치른다. 그는 다름아닌 주인공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취재하도록 지시했던 신문부 부장이다. 여기까지 올바른 선택지를 골랐다면⁵ 부장은 직접 자신의 몸을 칼로 찔러 저주를 퍼붓고, 주인공은 네놈의 저주 따위는 무섭지 않다고 말하면서 학교를 떠난다. 이것이 틈만 나면 학교의 저주에 휘말리는 주인공이 게임 내에서 저주를 극복하는 유일한 장면이다. 시나리오의 극악한 난이도가 보여주는 것처럼, 학생 신분으로 학교의 규율을 벗어나기란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학창 시절에는 학교만 졸업하면 지금의 생활이 끝난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학교는 한국 사회에 걸맞는 관료주의적 사고를 교육하기 위한 기관이다. 학교에서 계속해서 소외된 이들이 존재한다는 점과, 장애 학생들을 눈엣가시 취급한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진정으로 학교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학교라는 교육 기관이 표방하는 일체의 사회적 규율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졸업은 결국 학교의 연속이었다. 내가 학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느끼는 것은 결국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가면의 소녀

『학무』의 여러 시나리오 가운데서도 가면의 소녀는 특히 기이한 느낌을 준다. 이야기를 마친 학생들이 차례대로 사라져 버리는 가운데 주인공은 이야기를 계속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고, 학생들 역시 자신의 결말을 예감하면서도 무언가에 홀린 듯이 이야기를 멈추지 못한다. 이야기의 결말부에서는 수십년 전에 이지메를 당해 죽은 악령이 가해자 학생의 자녀들에게 죄를 씌워 복수를 했던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가면의 소녀는 규범에 의해 은폐된 것들의 귀환에 대한 이야기다. 학교 규범의 희생자인 그녀는 기존 규범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며, 그 힘은 이치에 맞지 않는 기이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녀는 학생들이 처음부터 자신에게 살해당할 운명이었으며, 주인공은 단지 그 안내역을 맡았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학생들을 모두 희생한 가면의 소녀는 지금까지 등장한 괴담의 세부적인 내용을 질문하며 주인공을 “심판”한다. 이 심판 파트는 플레이어가 유령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고 규범에 희생된 이들을 존중했는지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다.

『학무』에서 등장하는 직접적인 폭력 묘사는 대부분 학교 규범의 부조리와 얽혀 있다. 앞서 언급한 이지메나 살인 클럽과 같은 학생들의 폭력 행위는 겉보기에는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학교의 위계 질서와 맞닿아 있다. 반면에 영들이 행사하는 폭력은 학교 규율에 의해 은폐되거나 소외된 것들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영들의 폭력은 간섭할 수 없는 상위 세계로부터 일방적으로 행사되는 것이기에, 학생들은 이에 대항할 수단이 전혀 없다. 이지메를 당해 죽은 가면의 소녀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성불할 수 없다”며 자신의 당위성을 설명한다. 외부 규범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침해당한 이들은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자신의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 그 방식이 현실을 초월하면서도 현실 규범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학무』를 반복적으로 플레이하면서 나는 현실로부터 배제되어 감지될 수 없는 것들을 조금씩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유령들은 귀신 씌우고, 저주하며, 두려움을 조성하는 불온함으로 외부의 규범적 폭력에 저항한다. 중요한 것은 초자연적 존재의 유무가 아니라 그런 존재 양식이 실재할지도 모른다는 믿음이다. 베라르디는 이렇게 말한다. “(사상에서의 자유란) 안에 새겨진 가능성을 잊어버리고 현재 전개되는 권력 형식만을 보는 리얼리즘의 협박으로부터 자율을 의미한다.”⁶




게임 매체의 유령론

문화평론가 마크 피셔는 자신의 저서 『내 삶의 유령들』에서 21세기 문화에 나타나는 시대 착오와 반복, 노스텔지어 같은 퇴행적 감각을 포착한다. 그는 데리다의 유령론이 21세기 음악 문화에 끼친 영향을 분석하면서 현대 문화의 탈력감과 ‘미래 없음’의 감각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는 유령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문화적 혁신이 정체되고 심지어 후퇴한 시대에, 유령론의 한 가지 기능은 탈근대의 종말 너머에도 미래가 존재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주장하는 것이다. 현재가 미래를 포기했을 때, 우리는 과거의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잠재력을 통해 미래의 유물에 귀 기울여야 한다.”

나는 평소에 게임 매체와 마을 풍경, 폐허 탐험과 같은 공간적 체험을 통해 그런 퇴행적 감각을 인지해 왔다. 때문에 나는 기존의 유령론이 공간적 요소를 배제하고 시간의 문제만을 다루는 것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유령을 표현하는 데 주로 사용되는 어휘들―머무르는배회하는귀신들린(haunted) 등―은 그것의 장소적 특성을 지시한다. 여기서는 주로 게임 플레이의 유령적 측면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는 1970년대 말에 등장한 최초의 비디오 게임들이 항상 승리하도록 디자인되었으며, 이 첫번째 게임들이 미래 시대의 무능감과 탈력감을 예고했다고 말한다. “기계가 자기의 인간 창조자에 대항해 플레이하고 승리하는 것은 그 기계의 인간 창조자가 기계가 패배할 수 없는 방식으로 게임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게임 오버가 내장된 세계에 살고 있다.”⁸ 

게임 매체는 분명 어떠한 퇴행적 감각을 내포하고 있다. 이전해 비해 인식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게임을 한다는 것은 여전히 현실에서 도피한다는 함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베라르디가 게임 매체를 비롯한 전자적(electronic) 감각과 그에 뒤따르는 불감증을 문제삼은 것과는 반대로, 나는 현실로부터 적극적으로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게임을 골랐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밤 늦은 학교를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학무』를 비롯한 고전 게임들 덕분이었다. 나는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과 당시의 게임 경험을 서로 구분할 수 없다. 나는 학교 공간을 게임 룸으로 삼았고, ‘벗어날 수 없으면 즐겨라’ 라는 초자아적 명령으로 포장된 학교의 권위를 나만의 방식대로 이행했다. 나는 내 게임 경험이 학교 전체를 집어삼키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는 학교에서 도망치는 마음으로 졸업식을 마쳤다. 이 때부터 나는 고등학교 시절의 감각을 상기하기 위해서 『학무』를 했다. 게임은 졸업 이후의 공허함과 탈력감을 떨쳐낼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되었다. 게임을 켜면, 그들은 여전히 학교에 있었다. 나는 게임이 발매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같은 괴담회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상기하곤 했는데, 이들의 비극적 존재 양식은 내가 앞으로 계속해서 겪게 될 사회적 무능감을 예견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한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쫓겨난 것일 뿐이었고, 결국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학교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피셔는 데리다가 주장한 유령론의 가상성 두 가지 방식으로 구분한다. 첫번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트라우마적 반복이나 상실된 대상에의 강박 같은 정신분석학적 접근이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으로,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베라르디의 ‘잃어버린 미래’가 이에 해당한다.⁹ 게임 매체의 가상성은 현실을 뛰어넘는 매혹적인 대안 세계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후자에 속한다. 게임은 환상을 생산해내며, 그 환상은 게임 속 세계가 현실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작동한다. “게임에 빠져 현실로부터 도피한다”는 표현은 실상 게임 매체가 현실을 모사할 뿐만 아니라 현실을 넘어서 있음을 가리킨다. 학교의 유령들이 학교의 규범에 매여 있는 것처럼, 게임 매체 또한 현실 규범과 무관하지 않으면서 이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자신의 대안성을 상기해야만 한다.

게임 매체가 가상적인 것처럼, 게임과 대치되는 ‘현실’ 또한 집단적 합의에 기반한 가상의 구성물이다. 현실로부터 벗어나 대안적 환상에 안주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우리는 결국 그 현실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간 게이머에게 부여된 ‘사회부적응자’라는 낙인은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사회적 병리를 내포하고 있다. 내가 게임에 몰두했던 것은 전적으로 현실을 전유하기 위함이었다. 현실이 나를 압도하지 않을 수 있도록. 체념과 포기, 정신병, 퀴어라는 낙인, 자본주의적 현실, 자살 충동으로부터의 거리두기를 통해, 게임 매체는 현실의 어떤 면들이 내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나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게임을 했다. 여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학교에서 밤을 지새는 동안 느꼈던 어렴풋한 해방감을 기억한다. 내게 학교 공간은 최소한 그런 대안성을 상상할 수 있는 곳이기는 했다. 어쩌면 내가 바로 학교를 배회했던 그 유령이었고, 게임을 통해 학교의 권위로부터 밀려난 존재들을 상기했던 걸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게임을 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바깥 어딘가에 내가 있을 장소가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하기 위해 게임을 했던 것이었다.

피셔에 의하면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문구를 가장 생산적으로 읽는 방법은 “개인적인 것은 비개인적이다” 라고 읽는 것이다.¹⁰ 게임의 퇴행적 감각은 플레이어 자신이 현실과 단절되어 있다는 느낌에서 비롯된다. 중요한 것은 게임이나 게이머 자신이 아닌 현실 규범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상기하는 것이다. 게임 비평에는 그런 ‘현실’의 요소들을 반성적으로 끄집어 낼 수 있는 힘이 있다. 피셔가 말했듯이, 문화와 문화 비평은 우리가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¹⁰


¹ 게이머들이 종종 몰입도가 높은 게임을 두고 ‘시간이 삭제된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는 시간성이 무화되는 경험에 가깝다.
² 『학무』의 배경이 되는 고등학교는 전교생이 1500명이 넘는 ‘맘모스 학교’ 라고 묘사된다. 
³ 마크 피셔는 샤이닝의 유령론에 대한 글에서 가부장제 권력이 유령론적이라고 주장한다. 『샤이닝』과 같은 공포 드라마에서 여성은 집이라는 공간에 갇히거나 집과 동일시된다. 전통적 가부장제에서 집은 여성의 역할과 자리를 규정하고 억압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학교 공간과 학생 또한 이와 유사한 권력 관계에 놓여 있다. Mark Fisher, Ghost of my life』, Zero Books, 2014, 117p
⁴ "유령에게서 초자연적인 요소가 제거될 때 비로소 우리는 실재의 유령들과 조우할 수 있다." 같은 책, 115p
⁵ 
이 엔딩을 보기 위한 키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는 게임의 특정 장소를 두 번 조사해야 한다. 처음 조사할 때는 쓸만한 것이 없다고 나오며, 실수로 같은 장소를 두 번 고른게 아닌 이상 자력으로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⁶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미래 가능성』, 에코리브르, 2021, 77p
⁷ Mark Fisher,
The Metaphysics of Crackle: Afrofuturism and Hauntology』, Dancecult, 2013
⁸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미래 가능성』, 에코리브르, 2021, 64p
⁹ Mark Fisher, 
Ghost of my life』, Zero Books, 2014, 27p
¹⁰ 같은 책, 3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