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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마크 피셔 - 내 삶의 유령들 : The Caretaker 비평
우리 모두가 이론적으로 순수한 전진성 기억상실을 앓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라고 착각한 남자와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는 이 상태의 특징 – 흔히 잘못 정의되곤 하는 '단기 기억 상실'로 잘 알려져 있다 – 을 잘 보여준다. 사실, 기억 상실증 환자들은 새로운 기억을 생성할 수 있지만, 그 기억은 유지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장기적인 기억 인코딩이 없다. 이러한 기억 상실은 전진성(anterograde)이라고 불리며, 발병 이전에 형성된 기억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실제로는 오래된 기억도 일부 퇴화될 가능성이 있다.
The Caretaker의 음악은 앨범 Theoretically Pure Anterograde Amnesia에 이르러 그의 경향이 정점에 도달한 느낌을 준다. 한때 그것의 주제는 과거에 대한 향수였지만, 이제는 현재의 불가능성으로 옮겨갔다.
Selected Memories From The Haunted Ballroom은 일종의 복제된 기억 임플란트였다. 그것은 1920년대와 1930년대의 티룸 팝Tearoom Pop에 대한 잘못된 기억이었다. 알 볼리의 목소리가 샤이닝과 하늘에서 떨어지는 행운에서 연상되는 그 매혹적인 아픔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토탈 리콜Total Recall적인 여행은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 유령들은 매우 화려했고, 그들의 보브 헤어컷과 진주는 촛불 속에서 반짝였으며, 그들의 춤은 매우 우아했다. 거기에 숨겨진 참조는 마레니바드의 지난해와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샤이닝에 영향을 준 모렐의 발명일지도 모른다. 카사레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상상했다. 그 세계에서 아름답고 저주받은 존재들의 유령들은 영원히 보존된다. 그들의 작은 제스처와 하찮은 대화들은 반복을 통해 성스러운 유물로 변한다. 모렐의 섬에 있는 시뮬레이션 기계는 영화에 불과하지만, 누가 한 번이라도 카사레스의 주인공처럼 그 화면 너머로 가서 오래도록 애타게 그리워했던 유령들과 대화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것은 잭이 샤이닝에서 오버룩 호텔의 합의된 환상 속으로 진입하도록 만드는 유혹과도 같다. 황금빛 방에서 1920년대 스콧 피츠제럴드 시대의 엘리트들은 영원한 재치, 코카인, 부유함 속에서 끝없는 춤을 추고 있다. 그것은 완벽한 천국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천국행 티켓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잭?
알고 있나?
그것은 향수와 보존재로 미처 가리지 못한 썩은 냄새, 밀려오는 곰팡이 냄새다. 그것은 언제나 The Caretaker의 음악을 불편하게 만든 요소다. 듣기 쉽지 않은, 불편하고 어지러운 청취. 음악을 듣는 동안 우리는 항상 시야의 변두리에서 잠재된 그림자들을 무시할 수 없다. 기억의 길을 따라가는 여행은 우리의 미각을 매료시켰지만, 그 안에는 쓴 맛이 있었다. 그것은 홍역과 죽음에 대한 어두운 인지적 감각을 무의식적으로 마음 속 깊이 새기게 만드는 공포였다. 이는 포우의 붉은 죽음의 가면에 나오는 무도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뇌리에 계속 떠올랐을 법한 그런 감각이다.
그뿐만이 아니야.
뭔가 이상한 점이 있어.
알다시피 이러한 세피아 톤과 소프트 포커스의 낡은 느낌은 포토샵으로 조작된 것이다. 이 두꺼운 카펫과 도자기 차 세트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정신 속 시뮬레이션에 있었다. 음악의 반짝이는, 흐릿한, 슬로우 리버브(잔향)의 질감은 우리가 이것이 단지 객체일 뿐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 속 객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
Theoretically Pure Anterograde Amnesia에서, 상황은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마치 오버룩 호텔의 시뮬레이션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다. 불은 꺼졌고, 호텔은 썩었고, 오래 전 불에 탄 폐허 같은 곳이 되었으며, 음악 밴드는 창백하고 희미해졌다.
노스텔지어의 달콤한 유혹은 더 이상 위협이 아니다. 지금의 문제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회색빛 비와 정전된 텔레비전의 잡음 속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든다. 왜 여기선 항상 비가 오는 걸까? 아니면 죽은 채널로 맞춰진 텔레비전 소리였을 뿐이었나?
우리가 어디에 있지?
당신은 익숙한 장소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 사실을 유추할만한 단서가 거의 없다. 각 트랙에는 이름이 아닌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당신은 그 트랙들을 순서 없이 무작위로 들어도 된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길을 잃는 것이다. 이 흐릿하고, 느릿한 베케트적 풍경에서 길을 잃는 것은 쉽다. 사람들은 추상적인 형태가 연기와 안개 속에서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즉흥적으로 꾸며낸다. 이는 자서전적 거짓말이다.
누가 영화를 편집하는 거야? 왜 자꾸 점프 컷을 하지?
이제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몇 가지 괴로운 후렴구가 머릿속에 맴돌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현실의 사막과 구별되는 점은 거의 없다.
이 상태가 몇몇 불행한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친다고 상상하지 말자. 사실, 이론적으로 순수한 전진성 기억상실은 포스트모던 조건의 전형이 아닐까? 현재는 – 부서지고, 황폐화된 상태로 끊임없이 자취를 지우고 있다. 잠시 우리의 주의를 끌기도 하지만, 그 기억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러나 오래된 기억은 여전히… 때묻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기념되며… 나는 1923년을 사랑해…
우리는 정말 끝없이 박수를 보내는 유령들보다 더 많은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과거는 잊을 수 없고, 현재는 기억할 수 없다.
조심해, 바깥은 사막이야…
케어테이커의 작품 중에서도 틱톡에서 유명세를 탄 Everywhere at the End of Time이 특히 유명하죠. 저 역시 이 앨범으로 케어테이커를 접했는데, 치매의 각 단계를 음악으로 표현했다는 명확한 컨셉과 더불어 틱톡 바이럴의 자극성이 독이 되었는지 케어테이커를 논할때 '치매'라는 소재에 지나치게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심지어는 '다 좋은데 1930년대의 노래를 노스텔지어의 대상으로 소비한 것이 문제다'라는 평까지 봤어요.
사실 그 부분이야말로 케어테이커의 음악의 핵심인데, 노스텔지어는 현재의 지배적인 문화가 더 이상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 없다는 문화적 기억상실을 대변하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피셔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반복적이고 탈력적인 소비 방식이 그것의 원인이라고 지적합니다. 마크 피셔의 케어테이커 인터뷰에서 그는 "물론 (지금도) 새로운 것들이 등장하지만, 문제는 어떤 것이 떠오르면 그것이 성장할 시간도 없이 온라인에서 패러디로 묶여버리고, 그 씬이나 스타일은 채 등장도 하기 전에 죽어버려요." 라고 말한 바 있죠.
케어테이커가 SNS와 유투브 등지에서 뜬금없이 리미널 스페이스와 함께 묶여 소비되는 과정도 그것과 거의 똑같은 절차를 밟았다는 점에서 현대 대중문화의 퇴보적인 흐름을 다시 숙고할 수 있는 헌톨로지 음악조차 이러한 문화적 '퇴보'에 쓸려버리는 결과를 맞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Everywhere at the End of Time의 유명세 이후로 우후죽순 등장한 패러디 음원들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꽤 마음에 들었던 것이 있는데 마인크래프트, 언더테일, 지브리 등의 음원을 가지고 케어테이커 식으로 변주한 EatEoT MZ 버전입니다. 대부분의 패러디 음원들이 원곡의 '치매'라는 소재 혹은 자극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거나 특유의 '언캐니'한 분위기를 답습함에 그치는 것에 반해, 현 세대의 노스텔지어를 통한 문화적 쇠퇴라는 키워드를 캐치하고 있는 유일한 음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재로 쓰여진 원본 음악 중에서는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곡도 있다는 점에 주목할만 합니다. 21세기의 창작물조차 이미 노스텔지어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