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Featured

학교와 게임의 유령론 | 학교에서 있었던 무서운 이야기 (SFC, 1995)

학교를 벗어나고 싶었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방과 후에는 야자실에 갇혀 있다가 밤 늦은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간다. 그것의 반복. 다른 학생들이 어떻게 멀쩡히 지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밤이 되면 야자를 피해 학교 복도 뒤에 마련된 탈의실 공간에서 잠을 자거나 학교 주변을 맴돌면서 시간을 보냈다. 더러운 매트에 누워 스마트폰을 하다가 학교 경비가 순찰을 돌 때마다 기둥 뒤에서 숨을 죽였던 기억이 난다. 밤의 학교는 어둡다. 추위와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배터리를 아껴서 스마트폰 에뮬레이터로 게임을 했다.  학교 건물에서는 인터넷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작은 용량으로도 오래 플레이 할 수 있는 고전 텍스트 기반 게임을 선호했다. 낮 수업 시간에는 주로 일본어 공부를 했고, 밤 중에는 『역전재판』 시리즈, 『카마이타치의 밤』 등의 텍스트 어드벤처, 사운드 노벨 장르의 게임을 플레이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몰두한 게임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이었다. 조악한 실사 그래픽과 불안한 사운드, 과격한 이야기들로 가득한 이 게임에는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생동감이 있었다. 학교 공간은 유령에 씌여 있었다. 그 유령은 학교의 권위와 규율 로부터 온다.

하드보일드 장르의 안티테제로서의 <디스코 엘리시움>

사이버펑크와 마찬가지로, 하드보일드는 현대에 이르러 그 스타일만 취해질 뿐 알맹이 없는 장르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최근에 '카우보이 비밥'을 다시 봤는데 예전에 봤을때만큼 멋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과거에 사로잡혀버린 주인공, 주인공과 악연으로 얽힌 거대 조직의 간부, 주인공을 파국으로 이끄는 옛 연인 등 느와르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깊이 없이 남용된 클리셰 때문에 보는 내내 답답하기만 했다.

건조한 문체와 현실적이고 냉소적인 분위기로 대표되는 하드보일드는 세계대전 이후의 회의주의적인 시대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았다. 1920~30년대 미국에서 탄생한 초기 하드보일드는 대공황과 조직범죄의 확산, 그리고 사회적 불안이 짙어지던 시기를 반영하여 냉소적인 현실 인식을 강조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하드보일드는 전쟁이 남긴 상흔과 냉전 시대의 불안정한 정치·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였는데, 이러한 특징은 이후 필름 누아르 영화에 반영되어 당대 영화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80~90년대에 이르러 하드보일드는 사이버펑크와 결합하였는데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나 리들리 스콧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세계화와 기술 발전 속에서 거대 자본에 대한 불신과 경제적 혼란이 반영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형성했다.


이러한 장르적 흐름 속에서 2019년 발매된 CRPG 게임 <디스코 엘리시움>은 일견 하드보일드 장르의 전형적인 클리셰를 답습하는 듯 보인다. 게임의 주인공은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고 과거에 얽매인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형사 캐릭터다.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는 술과 마약에 찌들어 형사 일을 등한시하기 일쑤다. 겉보기엔 믿음직하지 못하지만 현장에서는 뛰어난 분석 능력과 신들린 듯한 직감, 노련한 수사 능력을 발휘하는 뛰어난 형사다. 

이렇듯 캐릭터 메이킹에서부터 하드보일드를 의식한 흔적이 보이지만, 디스코 엘리시움은 하드보일드 장르가 표방하는 냉소적이고 현실적인 가치관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하드보일드의 클리셰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장르 특유의 현실주의적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하드보일드 장르의 안티테제라고 볼 수 있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여러 면에서 기존의 하드보일드 장르와는 차별화된다. 먼저 게임은 주인공이 모든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시작된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은 과오와 실패로 얼룩진 자신의 과거를 조금씩 파헤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새롭게 재구성한다. 자신의 과거나 이전 시대의 역사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지언정 그것은 더 이상 고정되어 있는 불변의 가치가 아닌, 경험과 시대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것이 된다.

게임이 시작되고, 잠에서 깨어 거울을 보았는데, 기억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서술 방식은 감정을 결코 절제하지 않는다. 시적인 문체와 초현실적인 아트워크, 주인공의 감성적이고 나약한 내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서술 방식 등이 '하드보일드 형사'라는 전형적인 주인공 캐릭터와 상충되면서도 기묘한 시너지를 이룬다.

게임의 플롯 또한 냉철한 이성과 대비되는 감성과 직관을 중요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게임은 초현실적인 요소들, 예를 들어 비인간 존재와의 소통이나 초자연적 사건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이는 하드보일드 장르의 차가운 현실주의와 대비된다.

플레이어는 살인 현장을 조사하면서 시체와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작중 내에서 묘사되는 주인공의 실패는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주인공의 실패는 주인공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세계 전체의 실패다. 게임 전반에 걸쳐 강조되는 게임 내 역사상의 실패와 시대를 풍미하는 패배감은 주인공의 개인적인 실패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주인공의 옛 연인 ‘도라’는 게임 세계관에서 현실의 콜롬버스와 동일시되는 위인적 존재 ‘돌로레스 데이’와 겹쳐지는데, 이는 모더니즘의 가치, 미래지향적이고 개척자적인 시대 정신, 근대성과 인문주의에 대한 믿음, 그리고 이러한 모더니즘에 대한 향수를 상징한다. 주인공이 ‘이전 시대의 낡은 가치’를 잊지 못하고 계속해서 상기하는 것은 정체되고 냉소적인 시대 속에서도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그리움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암시한다.

작중의 역사 인물 퀴즈에서 주인공은 모든 문제에 '돌로레스 데이'라고 대답하려 한다.

오늘날 하드보일드 장르가 갖는 의의는 무엇일까? 수십년 전의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장르의 명맥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냉소적인 사회 분위기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당대의 사회 비판을 바탕으로 쓰여졌던 하드보일드의 장르적 특징은 이제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허무주의적인 분위기로 변질되고 말았다.

하드보일드가 냉소주의를 넘어서 작금의 정체된 시대 정신을 새롭게 환기할 수 있는 장르가 될 수 있을까? 디스코 엘리시움은 하드보일드 장르의 문법을 따르지만 그 세계를 살아가는 방식은 정반대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현대의 냉소주의적 분위기에 잠식되는 대신, 그 이면의 시대적 욕망과 미래적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 과거의 실패를 곱씹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과거를 재구성하여 거기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하드보일드 장르의 언어를 통해 냉소주의와 비관주의를 파훼하고 하드보일드의 장르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마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