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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 장르의 안티테제로서의 <디스코 엘리시움>
사이버펑크와 마찬가지로, 하드보일드는 현대에 이르러 그 스타일만 취해질 뿐 알맹이 없는 장르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최근에 '카우보이 비밥'을 다시 봤는데 예전에 봤을때만큼 멋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과거에 사로잡혀버린 주인공, 주인공과 악연으로 얽힌 거대 조직의 간부, 주인공을 파국으로 이끄는 옛 연인 등 느와르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깊이 없이 남용된 클리셰 때문에 보는 내내 답답하기만 했다.
건조한 문체와 현실적이고 냉소적인 분위기로 대표되는 하드보일드는 세계대전 이후의 회의주의적인 시대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았다. 1920~30년대 미국에서 탄생한 초기 하드보일드는 대공황과 조직범죄의 확산, 그리고 사회적 불안이 짙어지던 시기를 반영하여 냉소적인 현실 인식을 강조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하드보일드는 전쟁이 남긴 상흔과 냉전 시대의 불안정한 정치·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였는데, 이러한 특징은 이후 필름 누아르 영화에 반영되어 당대 영화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80~90년대에 이르러 하드보일드는 사이버펑크와 결합하였는데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나 리들리 스콧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세계화와 기술 발전 속에서 거대 자본에 대한 불신과 경제적 혼란이 반영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형성했다.
이러한 장르적 흐름 속에서 2019년 발매된 CRPG 게임 <디스코 엘리시움>은 일견 하드보일드 장르의 전형적인 클리셰를 답습하는 듯 보인다. 게임의 주인공은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고 과거에 얽매인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형사 캐릭터다.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는 술과 마약에 찌들어 형사 일을 등한시하기 일쑤다. 겉보기엔 믿음직하지 못하지만 현장에서는 뛰어난 분석 능력과 신들린 듯한 직감, 노련한 수사 능력을 발휘하는 뛰어난 형사다.
이렇듯 캐릭터 메이킹에서부터 하드보일드를 의식한 흔적이 보이지만, 디스코 엘리시움은 하드보일드 장르가 표방하는 냉소적이고 현실적인 가치관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하드보일드의 클리셰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장르 특유의 현실주의적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하드보일드 장르의 안티테제라고 볼 수 있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여러 면에서 기존의 하드보일드 장르와는 차별화된다. 먼저 게임은 주인공이 모든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시작된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은 과오와 실패로 얼룩진 자신의 과거를 조금씩 파헤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새롭게 재구성한다. 자신의 과거나 이전 시대의 역사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지언정 그것은 더 이상 고정되어 있는 불변의 가치가 아닌, 경험과 시대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것이 된다.
| 게임이 시작되고, 잠에서 깨어 거울을 보았는데, 기억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
게임의 플롯 또한 냉철한 이성과 대비되는 감성과 직관을 중요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게임은 초현실적인 요소들, 예를 들어 비인간 존재와의 소통이나 초자연적 사건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이는 하드보일드 장르의 차가운 현실주의와 대비된다.
| 플레이어는 살인 현장을 조사하면서 시체와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
작중 내에서 묘사되는 주인공의 실패는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주인공의 실패는 주인공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세계 전체의 실패다. 게임 전반에 걸쳐 강조되는 게임 내 역사상의 실패와 시대를 풍미하는 패배감은 주인공의 개인적인 실패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 작중의 역사 인물 퀴즈에서 주인공은 모든 문제에 '돌로레스 데이'라고 대답하려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