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어졌지만, USB가 보편화되기 전 1990년대까지 PC 시장을 지배했던 'PC 카드'라는 모듈이 있었다. PC 카드는 PCMCIA사가 개발한 휴대용 컴퓨터 전용 확장 모듈으로, 쉽게 말해 노트북 등의 소형 PC에 삽입 가능한 다양한 기능을 지닌 카드 모듈이라고 보면 된다. 등장 초기에는 메모리 카드로 주로 쓰이다가 이후 확장 포트, 무선 랜카드, 사운드카드 등 다양한 확장 기능을 제공하는 확장형 PC 카드가 등장하면서 컴퓨터에 여러가지 기능을 달아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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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Go 사의 Newton Peripherals MoGo 마우스. |
PC 카드 중에는 그 형태의 물리적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기괴한 제품들도 많았다. 그중 하나가 위의 PCMCIA 무선 마우스인데, 무리하게 PC 카드의 규격에 맞춘 형태라 직접 잡아 보면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 외에도 컴퓨터와 데이터를 연동할 수 있는 PCMCIA 핸드폰, 단자를 통해 충전가능한 무선 리모컨같은 제품도 있었다는데 후자의 경우는 그럭저럭 쓸만했을 것 같긴 하다.
어렸을 적엔 이런 PC 카드를 보면 '디지몬 테이머즈'에 등장하는 '카드 슬래시'가 연상됐는데, 애니메이션 초기에 아직 진화할 줄 모르는 성장기 디지몬들이 다채로운 방식으로 싸울 수 있도록 카드를 사용해서 디지몬에게 머신건이나 발톱 같은 파츠를 붙여주는 기술이었다. 이쪽은 카드를 삽입하는 게 아니라 긁는 것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카드 형태의 모듈을 통해 기능을 확장하고 기기 본연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PCMCIA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사실상 USB와 거의 비슷한 기능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단순히 기능 확장을 위한 모듈이 아니라 기기 본연의 물리적, 기능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시도들이 있다는 점에서 이쪽이 훨씬 로망 있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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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역 디지몬들이 진화할 수 있게 되면 거의 안 쓰인다는 점도 PC 카드와 닮았다. |
그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지금의 USB 단자로는 절대 구현할 수 없는 궁극의 PC 카드가 있다. 바로 Stash Card라는 물건인데, PCMCIA 단자를 물리적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비밀 금고'이다. 카드는 이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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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ashCard 광고와 설명서. |
카드 내부는 고작 3mm 두께의 얇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넣을 수 있는 물건은 기껏해야 SD카드나 쪽지 몇 장, 접은 지폐 한 장 정도로 한정되어 있다. 어떻게든 손에 넣고 싶어서 ebay 등을 전전긍긍 하다가 이 물건이 발매되었을 적의 리뷰를 발견했는데 평가가 매우 안 좋았다. 넣을 수 있는 물건도 거의 없었을 뿐더러 그 아늑한 크기, 은폐성, 노트북(당시 노트북은 중산층 이상만 가질 수 있는 고가의 물건이었다)이라는 공간적 특징 탓에 당시 미국인들은 여기에 숨길만한 '코로 흡입할 수 있는 하얀 알갱이'를 연상할 수밖에 없었나 보다. 화룡정점으로 StashCard 안에 동봉되어 있는 작은 설명서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경고 : 컴퓨터 내부는 뜨겁습니다. 녹거나 흘러나올 수 있는 알갱이 또는 액체 품목을 StashCard에 절대 넣지 마십시오."
직접 구해서 사용해 보니 그 절묘한 형태와 크기, 어지간해서는 발각되기 힘든 위치적 특수성 덕분에 그런 식으로 사용하기 딱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꼭 가루 형태가 아니라도 담배잎이나 대마 1회분 정도는 들어갈 것 같다. 실제로 그렇게 사용한 사람들도 꽤 있을법 했다.
용도야 어찌 됐든, 나는 StashCard가 컴퓨터 내부에 실제적인 '물리적 공간'을 제공한다는 아이디어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갈수록 얇아져만 가는 스마트 기기들에서 이러한 '틈새'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최소한 탈착식 배터리가 주를 이루었던 시기에는 직접 배터리를 탈거하면서 그것이 차지하는 물리적 공간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가상의 메모리가 차지하는 물리적 용량을 되새기며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난 두껍고 낡은 기술들의 쓸모를 생각해 본다.
재미있는 점은 StashCard가 대부분의 PCMCIA가 USB로 대체된 지금에 이르러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PC카드라는 것이다. 뭔가 작고 비밀스럽고 어쩌면 약간 불법적인 것을 숨기기엔 이만한 것이 없다. 오래된 구형 PC의 있는지도 모르는 낡은 단자 따위에 누가 관심이나 갖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