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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와 게임의 유령론 | 학교에서 있었던 무서운 이야기 (SFC, 1995)

학교를 벗어나고 싶었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방과 후에는 야자실에 갇혀 있다가 밤 늦은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간다. 그것의 반복. 다른 학생들이 어떻게 멀쩡히 지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밤이 되면 야자를 피해 학교 복도 뒤에 마련된 탈의실 공간에서 잠을 자거나 학교 주변을 맴돌면서 시간을 보냈다. 더러운 매트에 누워 스마트폰을 하다가 학교 경비가 순찰을 돌 때마다 기둥 뒤에서 숨을 죽였던 기억이 난다. 밤의 학교는 어둡다. 추위와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배터리를 아껴서 스마트폰 에뮬레이터로 게임을 했다. 학교 건물은 와이파이가 잡히지 않아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고, 나는 작은 용량으로도 오래 플레이 할 수 있는 고전 텍스트 기반 게임을 선호했다. 낮 수업 시간 동안에는 주로 일본어 공부를 했고, 밤 중에는 『역전재판』 시리즈, 『카마이타치의 밤』 등의 텍스트 어드벤처, 사운드 노벨 장르의 게임을 플레이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몰두한 게임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이었다. 조악한 실사 그래픽과 불안한 사운드, 과격한 이야기들로 가득한 이 게임에는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생동감이 있었다. 학교 공간은 유령에 씌여 있었다. 그 유령은 학교의 권위와 규율 로부터 온다.

『유희왕 듀얼 몬스터즈』 : 아우라의 상실과 배틀 시티




잃어버린 로망을 찾아서는 아동용 애니메이션 비평을 통해서 현실 구조의 반성적 틈새와 실천적 지점을 모색하기 위해 기획된 문화 비평 시리즈입니다.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벤야민의 저작을 읽을 때마다 유희왕을 떠올리곤 한다. 벤야민의 도시 경험과 상실된 어린 시절에 대한 문학적 감수성은 카드게임과 미니카, 팽이 배틀을 비롯한 놀이의 장이었던 나의 어린 시절의 풍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앞선 글에서 나는 유희왕 시리즈의 카이바 세토와 벤야민의 저작을 엮어, 카드 게임의 놀이적 규범에 내재된 유년기의 환상과 그 유사-낙원적 기능을 포착하고자 했다. 이는 나 자신의 유년 시절과 놀이적 풍경을 벤야민의 연구를 통해 돌아보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원작자 타카하시 카즈키는 『유희왕』 13권의 작가 코멘트에서 이렇게 쓴다. "유희왕이라는 매개물로 인해 여러분에게 친구가 한 명이라도 더 생겼다면 저는 이 만화를 그린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그것만큼 기쁜 일은 없답니다." 『유희왕』의 우정 묘사는 어딘가 숭고한 면모가 있다. 원작 1화에서 유우기가 천년 퍼즐을 맞추면서 빈 소원은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바램이었다. 그렇게 맺어진 유우기와 그의 친구 죠노우치의 인연은 고대 이집트의 잊혀진 유물─천년 퍼즐의 '아우라' 만큼이나 고결하고 존엄한 것으로 묘사된다.

애석하게도(어쩌면 당연하게도), 나는 유희왕에서 그런 '숭고한' 우정을 느껴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어렸을 적에 유희왕은 남자아이들의 전유물이었다. 방과 후 학교 밖에서 카드 게임을 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지만 놀이에 끼워주는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어쩌다 끼게 된 듀얼에서도 룰 숙지가 미흡했던 터라 여러 차례 실수를 했고, 애들은 그걸 빌미로 더 이상 놀이에 끼워주지 않았다. 듀얼할 기회는 커녕 룰을 가르쳐줄 친구조차 없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카드 놀이'라곤 몇몇 애들과 카드 교환을 하거나, 카드를 바닥에 늘어놓고 몬스터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전부였다. 혼자 카드 놀이를 하는 모습이 어른들의 눈에는 자폐적으로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이 또한 나 나름대로의 '카드 놀이'였고, 어떤 면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다른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아우라 충만한 우리들의 배틀 시티

만화 『유희왕』과 이를 원작으로 하는 『유희왕 듀얼 몬스터즈』의 '배틀 시티 편'은 카이바 세토가 이집트의 '묘지기의 일족' 이시즈 이슈타르로부터 고대 이집트에서 유래된 '신의 카드'를 건네받으면서부터 시작된다. 카이바는 또 다른 신의 카드의 소유자 마리크 이슈타르를 유인하기 위해, 도미노 시티 전역을 무대로 하는 듀얼 대회 '배틀 시티'를 개최한다. 천년 퍼즐에 봉인된 이름 없는 파라오와 그의 숙주 유우기를 중심으로, 마리크와 그의 잔당인 구울즈, 그리고 천년 아이템의 소지자들이 차례차례 도미노 시티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고대 이집트와는 아무런 연이 없는 고등학생 죠노우치는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다. 이전에 열린 듀얼 대회 '듀얼리스트 킹덤'에서 준우승을 거머쥔 그는 도미노 시티에서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들뜬 기분이다. 레어 카드를 노리고 덤벼든 구울즈와의 대결에서 자신의 실력을 자만하는 죠노우치. 결국 카피 카드로 꽉 채운 구울즈의 덱 앞에 처절하게 패배한 그는 자신의 에이스 카드 '붉은 눈의 흑룡'을 빼앗기고 만다.

이후 죠노우치는 이전 대회에서 준우승한 이후로 유우기를 따라잡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며 유우기 앞에 자신의 자만심을 고백한다. 그리고 배틀 시티에서 강자들과 대결하며 유우기와 같은 '진정한 듀얼리스트'로 성장하겠다고 선언한다. 그 때가 오면, 자신과 전력으로 듀얼해 달라는 약속과 함께.

이후 죠노우치는 배틀 시티를 통해 이전 '듀얼리스트 킹덤' 편에서 등장한 강적들과 대결하며 '진정한 듀얼리스트'로 거듭나기 위해 분투한다. 자신이 목표로 하는 진정한 강자, 우정의 가치를 일깨워 준 소중한 타인, 천년 퍼즐에 담긴 게임의 화신, 이름 없는 파라오. 자신의 이상에 조금씩 가까워질 때마다 어둠의 유우기에게 품은 동경의 감정은 점점 더 강렬한 것이 된다.

죠노우치에게 있어서 어둠의 유우기가 경외의 대상인 것처럼, 배틀 시티 또한 그에게 있어서 일종의 신화가 된다. 원작 이후의 이야기를 그리는 극장판 애니메이션, 『유희왕 더 다크 사이드 오브 디멘션즈』(이하 『디멘션즈』)에는 죠노우치가 작중 메인 악역의 소행으로 의식을 잃기 직전에 몰리는 장면이 있는데, 그는 배틀 시티에서 유우기와 마지막 대결을 펼치는 환상을 본다.

유희왕 극장판 『디멘션즈』에서 죠노우치가 본 환상.

발터 벤야민의 저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제시된 '아우라'는 대상의 유일성과 시간적·공간적 거리감에서 비롯되는 미학적 경험을 일컫는다. 아우라는 오래된 유물이나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예술품이 발산하는 시·공간적 거리감으로부터 동경 어린 경외심, 숭배와 합일과 같은 정서를 야기하는 미적 체험이다. 죠노우치가 경험한 초월적 체험이 야기하는 대상에의 경외 어린 존중심 역시 아우라라고 할 수 있다.1)

죠노우치의 아우라 체험은 『디멘션즈』의 환상 속에서 보았던 유우기와의 마지막 듀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강적들과 처음 대결을 벌였던 도미노 시티의 광장을 시작으로, 골목과 하천, 수족관, 천년 아이템의 힘에 세뇌되어 유우기와 죽음의 결투를 벌이게 되었던 도미노 항구에 이르기까지. 고대 이집트의 유물이 발하는 신묘한 힘, 이를 초월한 이름 없는 파라오와의 우정, 그를 따라잡기 위한 투쟁의 기억으로 가득한 도미노 시티는, 죠노우치에게 있어 유일무이한 체험의 장이자 아우라가 넘쳐나는 충만한 장소로 남았을 것이다.

아우라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가상'을 제공하는 예술의 의식적 가치를 환기시킨다.2) '아름다운 가상'은 지금-여기에서 닿을 수 없는 과거와, 그 과거에 대한 고유한 체험이 불현듯 현존하는 감각을 야기한다. 천년의 세월을 품고 현세에 신비한 힘을 발하는 천년 아이템은 아우라를 지닌 예술 혹은 유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작중에서 등장하는 복제된 신의 카드나 가짜 천년 아이템은 원본의 역사성과 고유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원본의 권위와 전승에 흡수된다.

이러한 배틀 시티의 '신화화'는 죠노우치의 시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차기작 『유희왕 GX』에는 듀얼 아카데미아의 학생들이 도미노 시티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유우기의 할아버지인 무토 스고로쿠가 학생들에게 직접 배틀 시티의 명소들을 소개시켜 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GX』의 주인공 유우키 쥬다이는 자신도 그 현장을 보고 싶었다며 동경 어린 눈빛으로 말한다. 어둠의 유우기와 천년 아이템의 소지자들이 신의 카드를 걸고 싸웠던 배틀 시티는, 후대의 듀얼리스트들에게 있어 듀얼리스트의 성지이자 유물과도 같은 신화적 장소가 되었다. 비단 작품 내에서뿐만 아니라, 어렸을 적에 『유희왕 듀얼 몬스터즈』를 보았던 현실의 어른들 역시 『유희왕』 의 신화화 및 유물화 과정을 겪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초판 '블랙 매지션' 카드나 '푸른눈의 백룡' 카드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유물이기도 하고 말이다.



배틀 시티 이후의 아우라의 상실

어둠의 유우기가 명계로 돌아간 이후의 이야기를 그리는 극장판 『디멘션즈』에서 가장 깊은 상실감을 겪는 인물은 천년 아이템의 '미신적인 힘'을 마지막까지 부정했던 카이바 세토다. 어둠의 유우기가 성불한 후, 카이바는 지금까지 수집한 어둠의 유우기의 듀얼 데이터와 홀로그램 기술인 솔리드 비전을 활용해 그를 현세에 구현하려 시도한다. 또한 그는 매장된 천년 퍼즐을 발굴하여 어둠의 유우기를 현세에 다시 강림시키려 시도하는데, 퍼즐을 직접 맞추었던 무토 유우기와는 달리 고도로 발달된 AI 기술을 통해 퍼즐을 풀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천년 아이템의 의식적 가치를 부정하는 카이바에게 천년 퍼즐은 아우라를 지닌 유물이 아니라, 어둠의 유우기를 현세에 소환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발터 벤야민은 현대인들이 기술 발전으로 인한 아우라의 상실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무한히 복제 가능한 이미지, 매체 기술의 확산으로 일회적이고 유일무이한 것이었던 아우라는 점차 그 가치를 상실한다. 아우라의 부재로 인하여 대상과의 거리를 잃은 현대인은 상실감을 느끼고, 대상의 '원본적 속성'을 재현하는 것에 병적으로 집착한다. 작중에서 카이바 세토는 어둠의 유우기를 완벽히 재현하려는 기술적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어둠의 유우기의 죽음을 부정하면서 데이터의 복제를 통해 그를 현세에 구현하려고 하는데, 이러한 시도는 카이바에게 모종의 공허함을 남길 뿐이다. 복제된 파라오의 '비전'은 원본의 아우라를 결여하고 있다. 어둠의 유우기의 '유일무이한 현존'은 결코 복제될 수 없다.

『디멘션즈』에서는 죠노우치가 듀얼하는 장면이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원작에서의 그의 비중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인데, 이는 배틀 시티가 종료되고 어둠의 유우기가 명계로 돌아간 시점에서 죠노우치가 듀얼을 하는 핵심 동기가 이미 유물화되었기 때문이다. 떠난 파트너의 빈자리를 느끼며 쓸쓸해하는 무토 유우기, 파라오에의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보여주는 카이바와는 다르게, 죠노우치는 성불한 어둠의 유우기에 대한 미련이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죠노우치가 아우라의 상실을 겪거나 유물화된 대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경이나 숭배의 감정에 빠지지 않은 것은3) 그들의 마지막 순간이 우정이라는 초월적인 가치를 통해 매듭지어졌기 때문이다. 어둠의 유우기가 명계로 돌아갈 때, 죠노우치는 "파라오든 아템이든 너는 내 친구다"라고 말하면서 유우기를 배웅한다. 카이바 세토의 마지막 행적 또한 그와 같은 타자에의 호명과 응답의 형태로 귀결된다. 『디멘션즈』의 결말부에서 카이바는 아우라를 현세에 재현하려는 시도를 그만두고, 자신이 직접 죽은 자들의 세계인 명계로 간다. 아우라의 상실의 시대에 과거의 영광에 끊임없이 집착하는 대신, 자신에게 빛을 주었던 유일무이한 타자, 어둠의 유우기와 재회하기 위해서.

『디멘션즈』이후를 그린 원작자 타카하시 카즈키의 일러스트. 어둠의 유우기와 재회하고 현세로 다시 돌아온 카이바는, 무토 유우기와 함께 '듀얼 몬스터즈'를 뛰어넘는 새로운 게임 개발에 착수한다.


놀이의 잔해가 된 마을 풍경

놀이로 가득했던 어린 시절의 풍경을 기억한다. 학교로 가는 언덕길. 아이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던 소란스런 문구점. 장난감 부딪히는 소리. 학교 앞 트램펄린에서 텃세를 부리던 아이들. 문방구 게임기 앞에서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 뒤에서 아이들의 놀이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던 나.

마지막으로 동네 바닥에서 카드를 주워본 것이 언제였을까. 돌이켜보면, 2010년 말 국내에서 방영된 『유희왕 VRAINS』에 등장하는 '틴당글 베이스 가드너' 카드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유희왕 VRAINS』는 2017년부터 2019년까지 방영된 유희왕 OCG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다.『VRAINS』는 가상 세계에서의 듀얼을 중심 소재로 삼은 작품인데, 주인공 후지키 유사쿠는 현실 세계에서 가상 세계에서의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20년 전 『유희왕 듀얼 몬스터즈』의 환경에서나 통할 만한 위장 덱을 들고 다닌다.

『VRAINS』에서 묘사된 유사쿠의 위장 덱.
시대와 환경에 뒤떨어져 사용 가치를 잃은 'DM 시절'의 카드들로 구성되어 있다.

친구와의 우정이 중심 서사를 이루었던 원작 『유희왕』과는 달리, 『VRAINS』에서는 등장인물간의 유대나 우정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다. 『VRAINS』의 마지막 화에서 유사쿠는 자신의 분신 격의 AI 파트너 '아이'와의 마지막 싸움을 끝낸 뒤, 현실에서의 모든 연을 끊고 종적을 감춘다. 유사쿠의 동료들은 그를 찾거나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커녕 "그런 애가 있었지" 라고 회상하면서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간의 유희왕 시리즈를 돌아보면, 원작 『유희왕』에서 마지막 작품인 『VRAINS』까지 참 먼 길을 왔다는 생각이 든다. 원작자 타카하시 카즈키가 원안에 관여했던 애니메이션 시리즈에서는 카드 게임의 오컬트적인 요소가 스토리의 중심 축을 차지했다. 하지만 원작자가 작품에 관여하지 않게 된 이후로는 그런 묘사는 사라졌다. 일회성의 미적 체험이 되어야 할 것들이 무한정 복사되어 흩어져 버리는 아우라 상실의 시대. 그런 오컬트 없는 가상 세계를 다루는 작품인 『VRAINS』에서 시리즈가 끝나버린 것을 단지 시리즈 부진에 의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현재 '블랙 매지션'과 '푸른 눈의 백룡' 카드에는 수십장의 리메이크 카드가 존재한다. 유희왕 OCG 애니메이션이 완전히 끝나버린 지금에 이르러서는, 원작 『유희왕』 뿐만 아니라 시리즈 전체가 유물화되어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희왕 듀얼 몬스터즈』에서 『유희왕 VRAINS』 사이에 등장했던 '예전' 카드들이 '요즘 환경'에서도 활약할 수 있도록, 새로운 일러스트와 수려한 효과를 달고 끊임없이 리메이크된다. 하지만 이렇게 리메이크된 카드들은 내게 이전과 같은 느낌을 주지 못하고 있다.

무언가가 빠져 있다. 무언가가 상실되었다. 어린 시절의 광채와도 같은, 동경했던 세계의 무언가가...

리메이크된 카드는 이전에 어린이들의 사적인 꿈으로 채워졌던 상품이 아닌, 상품처럼 의미를 잃어버린 사적인 꿈이다.4) 추억팔이의 대상으로 환원된 어린 시절의 신화. 기존 유희왕 시리즈의 상품화가 계속되는 현상은 어떤 식으로든 유희왕의 신화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코로나 이후로 『유희왕 듀얼 링크스』, 『유희왕 마스터 듀얼』과 같은 게임들이 발매되면서, 이제는 PC 환경과 스마트폰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듀얼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현실의 듀얼 환경 또한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자연스레 옮겨갔다. 유희왕 시리즈는 이제 과거를 유물화하는 동시에 가상 세계를 통해 영원화하고, 시간성과 장소성을 무화하면서 끊임없이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런 유희왕 시리즈를 즐길 수 없을 것만 같다.

반갑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내가 살아온 마을과 거리 풍경이 곧 재개발된다고 한다. 재개발 조감도를 보면 거리와 골목을 비롯한 학교 일대의 마을 풍경 전체가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질 예정이다. 기존의 그 어떤 역사성도, 현재성도 보장해주지 않는 도시 개발 방식. 외부 사람들에게 내가 사는 마을은 낙후된 곳으로밖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

조용할 날 없었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동네 아이들의 웃음 소리는 이미 끊긴지 오래다. 놀이적 풍경의 잔해 위에 다시 세워질 마을, 새로운 거리와 골목 풍경이 다시 아이들의 놀이 공간이 될 거라는 기대를 품고 싶다. 하지만 높은 최신식 아파트로 메워질 예정인, 당최 누굴 위한 개발인지 알 수 없는 재개발 조감도를 보면, 이 동네가 다시 아우라 넘치는 충만한 공간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언젠가 사라질 지금-여기, 놀이의 기억이 스며 있는 마을 풍경. 여기서 내가 경험한 것들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애니메이션에서 떠들어대는, 우정이니 뭐니 하는 거창한 말들도, 실질적으로는 경험한 적 없는 놀이적 공간에 대한 추억도... 유희왕은 그 자체로 내게 유년기의 표상이 되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닿을 수 없고, 실현된 적도 없는 이상적 세계의 표상. 

내가 추억하는 마을 풍경이 곧 사라진다는 것에 슬퍼하기보다는, 무너진 마을의 잔해 속에서 상실된 아우라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친구들과 카드 게임을 하는 대신에 카드를 바닥에 늘어놓고, 그 속에서 다른 무언가를 발견하려 했던 내 어린 시절의 감각을 되찾고 싶다. 2010년대 말에 주웠던 그 카드가, 내 마지막 카드가 아니길 바라면서.


1)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 길, 2010
2) 홍준기, 「발터 벤야민과 도시경험: 벤야민의 도시인문학」, 
발터 벤야민 모더니티의 도시』, 라움, 71p.
3) 벤야민은 아우라 경험이 과거와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종교의식에서 느끼게 되는 숭배와 예속의 감정, 절대적인 것에 대한 향수어린 동경과 합일의 감정에 빠져들게 만든다고 서술한다. 파시즘이 바로 이러한 경험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같은 글, 71-72p.
4) 노명우, 「벤야민의 파사주 프로젝트와 모더니티의 원역사」, 같은 책, 45p.